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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5 17:33
[유머] 눈물나는롯데의감독영광과좌절
 글쓴이 : 약선풍기
조회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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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25년 10인의 감독 '영광과 좌절'





롯데 감독 열전

2006 프로야구 올가이드







올해로 창단 25년을 맞는 롯데 자이언츠. 그동안 수많은 감독과 선수들이 팀을 거쳐갔다.

프로야구의 꽃이라는 사령탑은 현재 12대인 강병철 감독에 이르고 있다.

이 중 6명의 감독은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 퇴진했고

강 감독은 3번째 감독직을 맡은 특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3번 사령탑을 지낸 강 감독을 고려하면 역대 롯데 감독 10명 중 7명이 부산 출신이고

김진영(인천) 우용득(대구) 백인천(서울) 감독은 타지 출신이다. 또 부산 출신 중에도

강 감독과 성기영 감독이 부산상고, 박영길 김용희 감독은 경남고 출신으로

사실상 롯데 사령탑의 양대 인맥으로 자리잡고 있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영광과 좌절을 맛본 감독들을 찾아본다.





● 1대 박영길(1941년생)

스타 플레이어 출신 초대 지휘봉



롯데의 초대 사령탑은 박영길 감독이 맡았다. 박 감독은 당시 41세로 1979년부터 아마 롯데의

지휘봉을 잡았고 자연스럽게 프로로 자리이동했다. 박 감독은 선수 시절인 1963년과 1971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일궈내며 김응룡 현 삼성 사장과 함께 좌우거포로 한국을 대표했던

스타 플레이어 출신.



그러나 박 감독은 국내 최고로 평가받는 해박한 야구 지식에 비해 프로야구 사령탑으로서는

선수시절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롯데 초대 감독 자리에 올랐지만 박 감독이 원했던

선수 구성은 하지 못했다. 1982년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문에 최동원과 포수 심재원,

유두열 등의 프로행이 보류됐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당시 팀 구성에 대해 "삼성이나

OB(현 두산)처럼 스타 선수가 없어 좋은 성적을 내기에는 사실상 무리였다"고 회고했다.

결국 롯데는 원년인 82년 전기리그에서 13승27패로 5위, 후기리그에서도 18승22패로

4위에 머물렀다.



1983년도 마찬가지. 심재원, 유두열 등이 합류했지만 에이스인 최동원이 메이저리그

토론토와의 계약 문제로 분규에 휘말려 시즌 직전에 팀에 합류했다.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

당한 어깨부상의 후유증으로 전반기 4승(8패)에 그쳤다. 팀도 22승27패로 4위에 처졌다.

박 감독은 결국 1983년 7월6일 성적 부진으로 중도 퇴임하고 당시 강병철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 2대 강병철(1946년생)

30대 감독으로 취임 첫해 첫 우승



강병철 감독은 1983년 후기리그 박영길 감독의 해임으로 불과 37세의 나이로 감독 대행직을

수행했다. 1983년 후기리그 성적은 21승29패로 최하위. 하지만 1984년은 더욱 험난했다.

당시 코칭스태프는 강 감독과 이희수, 서말구 코치 등 3명. 육상 100m 한국기록 보유자인

서말구 코치를 제외하면 사실상 이희수 코치와 둘이서 팀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다.



강 감독은 에이스 최동원과 함께 원투펀치를 형성하기 위해 동아대 제자 임호균을 삼미에서

데려왔다.



1984년은 강 감독과 최동원의 해였다. 전기리그에서 9승을 따낸 최동원은 후기리그 50게임 중

31게임에 등판, 18승6패5세이브를 기록해 팀이 후기에서 거둔 29승 중 무려 23승에 얼굴을

내밀었다. 정규리그 토탈 27승.



전기리그 4위에 그쳤던 롯데는 최동원의 활약과 그 유명한 삼성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게임으로

후기리그에서 29승20패로 우승을 차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리고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으로 감독 취임 첫 해에 30대 감독으로서 롯데의 첫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최동원의

무리한 등판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강 감독은 '투수를 혹사시킨다'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강 감독 자신도 최근 "감독 생활 중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바로 최동원의 혹사였다"고 말했다.



1985년에는 59승51패(승률 0.536)의 성적을 올렸지만 삼성의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으로 끝났고

1986년에는 50승52패6무로 승률이 5할대 밑으로 떨어졌다. 시즌 후 강 감독은 재계약에 사실상

합의했지만 코치 인선으로 박종환 전무와 마찰을 빚다 끝내는 재계약금 시비(속칭 강병철 감독의

'과자값 사건')로 번져 잔류에 실패했다.





● 3대 성기영(1937년생)

팀 분위기 와해… 1년만에 중도하차



롯데는 1987년 강병철 감독의 후임으로 당시 영남대 감독을 지내고 있던 성기영 감독을

영입했다. 코칭스태프는 허구연 김성관 김청옥 등 대부분 경남고 출신이었다.



롯데는 1987년 임호균 양상문 등 5명을 청보로 보내고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를 받아오는

5-3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하지만 한문연 김용희 박영태 등 주전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이탈, 전기리그 4위(27승25패2무) 후기리그 3위(27승24패3무)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최동원 14승(12패), 프로 2년차인 윤학길 13승(10패)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려볼만

했지만 후반기에 갑작스럽게 터진 선수기용에 따른 금품수수설이 터지면서 팀 분위기가

와해됐다. 결국 실체도 없는 의혹에만 그쳤던 금품수수설로 롯데는 사기가 꺾였고 또 당시

고참 선수들과 구단 프런트의 갈등까지 보이지 않게 작용, 롯데호는 좌초했다.

당초 계약금 3000만원에 3년 계약을 맺었던 성 감독은 1년 만에 해임됐다.





● 4대 어우홍(1931년생)

김시진 부진… 89년 꼴찌 수모



4대 감독으로 부산출신의 원로 어우홍 감독이 사령탑에 앉았다.

어 감독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명장. 어 감독은 57세의

늦은 나이에 고향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 감독의 부임 첫 해는 경기보다 외적인 문제로

더 힘들었다. 바로 팀 에이스인 최동원의 재계약 문제였다.



해마다 스토브리그에서 갈등을 빚었던 최동원은 1988년 9000만원을 요구했고 구단은

전년도 14승은 동결에 해당된다며 8910만원으로 버텼다. 결국 90만원 차이로 연봉 줄다기를

벌인 최동원과 구단은 급기야 감정싸움까지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 감독의 중재로 시즌이

개막하고도 절반이나 지난 6월29일에야 겨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1988년 윤학길이 18승을

올리고 팀 타선도 0.270의 불방망이를 휘둘렀지만 결국 팀은 전기 4위(29승24패1무),

후기 3위(28승25패1무)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후 선수협의회가 발족되면서

롯데와 최동원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11월23일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에 보내고 대신

김시진 허규옥 오대석 전용권을 받는 프로야구 사상 최대 트레이드가 단행됐다.

어 감독은 1989년에는 윤학길과 김시진을 앞세워 상위권 진입을 노렸지만 김시진이 4승9패로

부진, 꿈을 이루지 못했다. 팀도 48승67패5무로 꼴찌로 추락했고 막강 파워를 휘둘렀던

박종환 전무도 시즌 중에 옷을 벗었다. 어 감독은 계약 기간 만료와 함께 자연스럽게

롯데와의 인연을 끝맺었다.





● 5대 김진영(1935년생)

'인천 야구의 대부' 결국 중도하차



롯데는 최하위로 추락한 팀을 추스르기 위해 처음으로 부산과 연고가 없는 인천 출신의 김진영

감독을 영입했다. 인천 야구의 대부로 존경받던 김 감독은 1983~85년 삼미 감독을 맡은 뒤

5년만에 프로에 복귀했다. 이때 눈길을 끈 대목은 코칭스태프. 도위창이 수석코치로 복귀하고

삼미시절 30승 기적을 만들었던 '너구리' 장명부를 투수코치로 기용했다. 롯데는 시즌 초반

2위로 내달리다 중반부터 추락, 6위로 곤두박질 쳐 구단은 8월26일 최초 타지역 출신인

김 감독을 해임시키고 도위창 대행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렀다.





● 6대 강병철(1946년생)

5년만에 재입성… 100만 관중시대



김진영 감독의 후임으로 롯데는 1984년의 영광을 떠올리며 강병철 감독을 다시 사령탑에 앉혔다.

두번째 사령탑에 오른 강 감독은 신인 발굴과 스타 만들기로 다시 한번 팀을 재건했다.

신인 박정태와 전준호가 입단, 주전을 꿰찼고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응국과 김민호,

장효조 등이 소총 타선의 진가를 보여줬다.



또 윤학길이 17승, 박동희가 14승, 부산고 출신 신인 김태형이 11승을 올리며

롯데는 61승61패3무로 4위를 기록, 1984년 이후 7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와 함께 100만1920명의 관중이 입장, 최초로 1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1992년은 감격의 'Ⅴ2'시즌. 당시 사직구장은 16차례의 만원 사례를 포함해 120만9632명의

관중 동원 기록을 세웠다. 투타가 완벽한 해였다. 마운드서는 부산고 출신 신인 염종석이

펄펄 날았다. 강 감독은 염종석에 대해 "처음에는 대단한 투수가 들어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염)종석이의 투구를 본 일본 관계자가 극찬을 해서 기용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염종석은 정규리그 17승, 한국시리즈 1승을 포함한 포스트시즌 4승1세이브로

속칭 롯데 우승을 위해 '미친'선수가 됐다. 또 타선은 김응국 김민호 전준호 이종운 등 공포의

좌타군단과 박정태 등 5명이 3할 타율을 올려 팀 타율이 1987년 삼성(0.300)에 이어 최고인

0.288을 기록했다.



정규리그 71승55패를 기록,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2연승을 거둔 뒤 플레이오프에서는 당대 최강 해태를 3승2패로 따돌리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강 감독은 당시 빙그레 감독이던 스승 김영덕 감독과 맞대결,

4승1패로 두번째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그러나 다음해인 1993년에는 박정태가 정강이뼈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우승 후유증에 빠져 6위로 추락했다.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적이었던 강 감독은 구단과 최고 대우 문제로 마찰을 빚으며

86년도를 재판, 결국 감독설이 유력했던 빙그레로 자리를 옮겼다.





● 7대 김용희(1955년생)

'자율야구' 한국시리즈 준우승



1994년 롯데는 강병철 감독의 후임으로 원년 멤버이면서 선수시절부터 '미스터 롯데'로 불렸던

김용희를 감독으로 낙점했다. 김 감독이 내건 것은 미국식 '자율야구'. 또 김 감독은 박동희를

팀 사상 처음으로 전담 마무리로 돌리고 투수 분업화를 시도했지만 윤형배 염종석 김상현 등

주력 투수들의 군입대와 부상 등으로 56승67패3무를 기록, 6위로 첫해를 마감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자율 야구의 꽃을 피웠다. 윤학길(12승)과 고졸 2년차 주형광(10승)이

마운드를 지키고 부상에서 부활한 박정태와 '마림포'로 이름을 날린 신인 마해영과 2년차

임수혁이 중심타선에서 파워를 과시했다. 특히 아직도 기록으로 남아있는

한 시즌 팀 최다 도루 220개를 앞세운 기동력 야구가 빛을 발했다.



정규리그 3위를 차지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 없이 플레이오프에 진출, 당대 최고의 투수

이상훈이 버틴 LG를 4승2패로 완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라 OB와 맞붙었다. 롯데는 5차전까지

3승2패로 앞서 3번째 우승을 눈앞에 뒀지만 6,7차전을 잇따라 내주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롯데는 좋은 성적을 거둔 다음해 급락하는 전철을 다시 밟았다. 1996년 5위로 떨어졌고

1997년에는 기대했던 문동환의 부진과 신인 손민한의 수술로 성적이 하락, 꼴찌로 추락했다.

1998년에도 최하위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구단은 그해 6월15일 김 감독 해임이라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김명성 투수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미스터 롯데로 불리며 기대를 모았던

김 감독은 선수들의 잇단 부상 등으로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채 낙마했지만 역대 감독 중에서

가장 긴 4년 반동안 팀을 이끌었다.







● 8대 김명성(1946년생·작고)

호세 앞세우고 준우승 도약



김용희 감독이 떠난 뒤 롯데의 사령탑을 맡은 김명성 감독은 1982년 창단 당시 코치 출신이다.

야구계에서 흔하지 않은 부산공고 출신인 김 감독은 원년 롯데를 시작으로 청보·태평양,

삼성, LG 등을 거치며 투수 조련사로 '명성'을 날렸다.

김 감독은 역대 감독들과 달랐다. 평소 다도와 서예를 즐겨 사직구장 감독실에는 항상

은은한 차향이 풍겼을 정도로 고고하게 살았다. '김 교수'라 불릴 만큼 똑똑해 기업체 등에

강의를 나가는 별난 야구인이었다.



김 감독은 1999년 정식 사령탑에 오르면서 운명의 선수를 만났다. 올시즌 롯데에 복귀한

'검은 갈매기' 펠릭스 호세다. 전지훈련까지 호세는 빅리그 올스타 출신의 위용은 커녕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다녀 김 감독이 "잘못 뽑았구나"라며 여러차례 후회를 하기도 했다.

막상 정규리그 뚜껑을 열고보니 호세는 슈퍼 용병이었고 롯데는 호세의 눈부신 활약을 앞세워

처음으로 양대리그로 나눠진 1999시즌 드림리그 2위를 차지, 매직리그 1위 삼성과

플레이오프를 벌였다. 롯데는 1승3패로 뒤지다 호세와 마해영, 임수혁의 극적인 홈런포를

앞세워 드라마같은 역전 승부를 연출했다. 유명한 호세의 대구구장 방망이 투척 사건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전력을 소모,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1승4패로 무너졌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로 재계약에 성공한 김 감독은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2001년을

맞았다. 롯데는 호세가 복귀했지만 마해영의 트레이드 등 전력 누수로 힘겨운 승부를 벌였다.

성적은 하위권으로 처졌고 고고했던 김 감독도 '성적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운명의 7월24일 남해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다 심장 통증을 호소,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롯데는 최하위로 처졌고 이후

2004년까지 암흑기가 이어졌다.





● 9대 우용득(1950년생)

16연패 악몽 속 시즌 3달만에 경질



갑작스러운 김명성 감독의 사망으로 다급해진 롯데는 삼성 감독 경험이 있던 대구 출신 우용득

1군 수석코치 체제로 팀을 재편했다. 2001년을 치른 우 감독은 2002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초반부터 팀은 갈짓자 행보를 거듭했다. 역대 최고 용병으로 평가되던 호세는

몬트리올과 이중계약 문제로 영구제명 당했고 자유계약선수(FA) 김민재는 SK로 갔다.



우 감독은 6월 전국이 월드컵 열기에 빠져 있는 동안 16연패의 참담함을 맛봤고 결국 6월21일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정식 감독이 돼 시즌을 치른 지 불과 3달도 안된 경질이었다.





● 10대 백인천(1943년생)

무리한 팀개편… 3년 연속 최하위



우용득 감독 후임으로 롯데가 찾은 해법은 백인천 감독이었다. 당시 만 59세의 백 감독은

1990년 LG시절 우승도 경험했고 무엇보다 타격에서 만큼은 국내에서 1인자로 손꼽혔다.



롯데는 통상 대행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르는 관례를 깨고 백 감독을 10대 감독으로

정식 취임시키는 변신을 꾀했다. 그리고 백 감독도 그에 화답하듯 야구인들의 허를 찔렀다.

바로 잔여시즌 포기와 대대적인 팀 개편이었다.



또한 훈련과 경기 스타일도 모두 백 감독 특유의 일본 스타일로 바꿨다. 시즌을 아예 포기했던

롯데는 2002년 35승97패1무, 승률 0.265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지옥같은 한해를 보냈다.



2003년도 비슷했다. 구단에서 뚜렷한 전력보강을 하지 않아 다급한 백 감독이 직접 일본

지인들을 통해 재일교포 포수 김영화 등을 영입했지만 개막과 함께 모두 퇴출됐다.

팀 리더였던 FA 박정태와의 계약도 질질끌어 선수단 분위기는 시즌 전부터 초상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개막과 함께 12연패의 수렁에 빠져 시즌 전체 성적을 예감케 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던 백 감독은 연패와 함께 서서히 통제력을 잃었고 거의 매일 바뀌다시피하는

선수기용으로 팬들로부터 강력한 역풍을 맞았다.

백 감독 퇴진운동이 일어났고 8월5일 옷을 벗었다.





● 11대 양상문(1961년생)

젊은 선수 과감한 발탁 세대교체 단행



제10대 백인천 감독 선임이 깜짝 발표였다면 2003년 시즌 후 양상문 감독 선임은 충격에

가까웠다. 당시 전문가와 언론, 팬들은 모두 감독대행을 맡고 있던 김용철 수석코치의

감독 승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양 감독 선임과 함께 롯데는 또다시 깜짝 뉴스를 만들어냈다. 짠돌이 구단의 이미지를 벗는 듯

60억원 거액을 들여 FA 정수근과 이상목을 영입한 것. 그러나 이상목은 부상으로 3승에 그쳤고

정수근은 폭행사건에 휘말려 오히려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팀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적은 50승72패11무로 4년 연속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2005년 비로소 빛을 발했다. 에이스 손민한이 개막전부터 호투 행진을 벌였고

이용훈, 장원준이 힘을 보탰다. 여기에 팀 역사상 유일하게 제대로 된 마무리 노장진이

불패 신화를 쓰면서 시즌 초반 한때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기용한 것이 적중했다.



그러나 6월 악몽의 9연전에서 1승8패로 추락하며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양 감독은

4년만의 꼴찌 탈출을 인정받아 재계약을 보장받은 듯 했다.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까지

구단측은 "대안이 없다"는 말로 재계약을 기정사실화 했으나 지난해 10월17일 "강병철" 감독을

3번째로 영입하면서 또다시 충격을 던졌다.





(국제신문 2006/04/05)



출저-http://blog.naver.com/shinescent/100028598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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